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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다국적 공동 제작 영화의 문화적 혼합과 정체성, 경계에서 피어나는 서사

by 별빛청하 2025. 5. 12.

 

국경을 넘은 협업으로 제작된 영화는 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정체성을 제안하지만, 동시에 혼종성과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다국적 공동 제작 영화가 보여주는 문화적 융합의 양면성과 그 서사적 함의를 고찰한다.

공동 제작, 문화는 공유되는가 혹은 교란되는가

영화는 더 이상 한 나라의 경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본은 국제적으로 흐르고, 창작진은 세계 곳곳에서 모이며, 배우는 국적을 초월해 캐스팅된다. 이처럼 다국적 공동 제작 영화는 문화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그러나 이 경계의 흐릿함은 단순한 다양성의 확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정체성의 확장과 동시에 희석의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

공동 제작 영화는 종종 각국의 정부 기관이나 제작사가 자본과 인력을 결합하여 제작된다. 이때 가장 큰 장점은 자원과 시장의 확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각자의 문화적 감수성이 어떻게 조화되고, 얼마나 고유성을 유지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정체성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문화적 혼합은 상호 보완적일 수도 있고, 상호 침범적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다채로운 감각의 융합이 이뤄지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각국의 특색이 흐려진 채 보편성이라는 이름 아래 평탄한 감정선만 남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까?

이번 글에서는 주요 다국적 공동 제작 영화들을 통해 그 안에 스며든 문화적 혼합의 방식과, 영화가 지닌 정체성의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오늘날 글로벌 영화 시장의 흐름과 그 안에서의 예술적 방향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경계를 넘는 서사, 혹은 잃어버리는 고유성

1. <바벨 Babel> (2006,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미국, 멕시코, 모로코, 일본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생한 사건이 하나의 구조 속에 연결된다. 각 지역의 언어, 삶의 방식, 고립과 소통의 문제가 교차되며 문화적 차이를 이야기의 본질로 끌어들인다. 공동 제작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자, 다양성이 곧 서사의 핵심이 된 예이다.

2. <클라우드 아틀라스 Cloud Atlas> (2012, 워쇼스키 자매 외)
한국, 독일, 미국의 합작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여섯 개의 시대, 여섯 개의 문화가 연결되는 서사 구조를 가진다. 장르와 언어, 배우의 역할조차 넘나드는 이 영화는 공동 제작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실험적인 문화적 융합의 형태를 보여준다.

3. <설국열차 Snowpiercer> (2013, 봉준호 감독)
프랑스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한국 감독이 헐리우드 제작진 및 배우들과 함께 만든 대표적인 다국적 프로젝트.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사회 계급을 이야기하며, 글로벌한 주제를 로컬적 시선으로 풀어냈다. 봉준호 감독의 시선은 고유했고, 제작은 국제적이었다.

4. <더 페이버릿 The Favourite> (2018)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영국 역사극을 연출하고, 영국 및 아일랜드, 미국 자본이 참여한 공동 제작 영화다. 다국적 협업이지만 감독 특유의 스타일과 감각이 뚜렷하게 살아 있다. 이는 다국적 협업에서도 창작 주체의 고유성이 지켜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5. <미나리 Minari> (2020, 정이삭 감독)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지만, 제작진과 출연진 대부분이 한국계이며, 언어도 대부분 한국어로 구성된 이 영화는 ‘어느 나라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다국적 제작 시스템 안에서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혼합은 상생인가 침식인가

다국적 공동 제작 영화는 오늘날 세계 영화 시장의 필연적 흐름이자, 동시에 복잡한 문화적 딜레마를 내포한 예술이다. 국경을 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논리만이 아니라, 서사와 감정의 범위를 넓히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질 때 비로소 진정한 융합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각 문화의 ‘존중과 균형’이다. 공동 제작이라는 이름 아래 자본 논리가 앞서게 될 때, 영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기계적 산물로 전락할 수 있다. 반면 창작자의 시선과 정체성이 살아 있는 다국적 협업은, 오히려 새로운 미학을 창조해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어느 나라 영화인가’라는 질문보다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시선으로 말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정체성은 태생이 아니라, 이야기의 방식과 감정의 깊이 속에 있다.

다국적 공동 제작 영화는 경계에서 태어난다. 그 경계는 충돌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언어가 태어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언어는 세계를 향해 말하되, 결코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